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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옷은 누구를 말했나? 계급과 권위를 입은 의복의 역사

by moneyinfohub7 2025. 4. 20.

고려시대 의복은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닌 신분을 드러내는 사회적 언어였다. 계급별 복식 규정과 장신구 속에 담긴 권위의 상징을 되짚어본다.

 

고려시대 옷은 누구를 말했나? 계급과 권위를 입은 의복의 역사

왕과 귀족의 의복, 권위와 정치의 시각적 상징

고려시대 의복의 가장 두드러진 기능 중 하나는 바로 ‘권위의 시각화’였다. 옷은 단지 몸을 가리는 물건이 아니라, 입는 사람의 신분과 권력을 사회에 드러내는 언어였다. 특히 왕과 고위 귀족의 복장은 단순한 호화로움 이상으로, 국가 질서를 유지하고 왕권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왕의 복장은 중국 송나라의 황제 복식을 모방하여 구성되었으며, 황색을 기본으로 하는 곤룡포, 용 문양이 들어간 관복, 익선관 등은 오직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용은 하늘의 존재, 즉 천자(天子)를 상징했기 때문에 왕 외에는 어떤 계급도 용 문양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왕세자나 왕자도 이러한 문양 사용에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귀족 계층도 자신의 지위에 따라 복식을 차별적으로 착용했다. 문무 관료는 관등에 따라 색상이 나뉘었고, 품계가 높을수록 자색이나 단청색 등 화려한 색을 입을 수 있었다. 반면 하위 관료나 지방 향리는 청색, 회색 등의 단조로운 색상으로 제한되었다. 이는 곧 ‘무엇을 입을 수 있느냐’가 사회적 권한의 범위를 결정짓는 기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식 질서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법령으로 규정된 사회 시스템이었다. 『경국대전』이나 『고려사』와 같은 국가 문헌에는 복장 규제가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고,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도 가능했다. 고려는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신분 위계가 명확한 사회였고, 의복은 이 질서를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내는 장치였던 것이다. 결국 왕과 귀족의 복장은 정치적 권위, 종교적 상징, 미학적 가치가 집약된 종합적 상징이었다. 고려시대 옷은 그 자체로 정치였다. 누가 어떤 옷을 입었는가 하는 문제는 곧 사회 질서를 정의하는 일이었다.

중인과 평민의 옷차림, 실용성과 제약 사이의 경계

고려 사회의 중하위 계층인 중인과 평민, 노비에게 있어 의복은 실용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동시에 엄격한 제한과 제약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입는 옷은 계급의 한계를 드러내는 도구였고, 신분을 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이기도 했다. 중인 계층은 의관, 역관, 서리 등 기술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로, 일정한 사회적 인정을 받았지만 양반처럼 자유로운 복식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들은 청색이나 백색의 의복을 주로 입었으며, 장식이 적은 단정한 형태의 옷을 착용했다. 관복은 착용할 수 있었지만 품계에 따른 색상 및 문양의 제한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옷차림 하나로 신분을 가늠하는 사회에서, 이들은 결코 상류층으로 보이지 않도록 규제되었다. 평민과 농민, 상공업자들은 대부분 면이나 삼베와 같은 저렴한 소재를 사용해 옷을 만들었다. 색상은 주로 무색에 가까운 흰색이나 회색, 염료를 최소한 사용한 갈색 계열이었다. 흰옷은 고려 말기에 민간에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백의민족’이라는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흰옷은 순수함보다는 경제성과 기능성을 우선한 결과였다. 노비나 하급 일꾼은 더한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법적으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일부 직종에 따라 특정 형태의 옷만 허용되기도 했다. 도포나 장삼 같은 양반풍 옷차림은 금기시되었고, 색상과 소재 사용에도 제한이 많았다. 이것은 단지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시각적 통제’였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민간은 나름의 미적 감각을 유지하려 했다. 명절이나 잔치 등 특별한 날에는 새 옷을 맞추거나 손수 옷을 다듬어 체면을 차리기도 했다. 실용성과 검소함 속에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고려 평민의 옷은 ‘입는 삶’의 기록이며, 억압과 창의성 사이에서 존재했던 계급문화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장신구와 복식 규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분을 입다

고려시대 의복은 옷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부속품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였다. 즉 신분은 옷뿐 아니라 허리띠, 머리 장식, 신발, 액세서리 등 모든 외적 요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는 ‘보는 자’와 ‘입는 자’ 사이에 신분 질서를 각인시키는 시각적 장치였다. 가장 상징적인 장신구는 비녀였다. 여성이 결혼했는지, 어떤 계급인지, 나이가 얼마인지를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였다. 금비녀나 옥비녀는 귀족층 여성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반 평민 여성은 나무나 뼈, 간소한 놋쇠로 만든 비녀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외모 꾸밈의 수준이 아니라 신분의 수준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남성 역시 관모와 허리띠, 신발에서부터 계급이 드러났다. 고위 문신은 흑피로 만든 가죽화에 자수를 놓은 신을 신었으며, 일반 평민은 짚신이나 나막신 정도로 제한되었다. 허리띠에도 구슬, 금속 장식이 들어간 경우는 상류층에게만 허용되었으며, 관등에 따라 금속의 종류도 달랐다. 금제와 은제 장신구는 왕과 고위관료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신분 도용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는 이러한 복식 차이를 단순히 사회적 상징으로 보지 않았다. 실제로 복식에 대한 법적 통제는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복색 금지령’ 등의 형태로 정기적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옷을 통한 신분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 단속도 진행되었다. 한 사람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 직책, 성별, 심지어 혼인 여부까지 알 수 있었기에, 복식 질서의 유지가 곧 사회 질서 유지와 직결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복식 통제는 억압의 수단이자,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제도였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매일 아침 옷을 입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까지 허용된 존재인지를 확인받았다. 그 옷은 자율이 아닌 규범의 결과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분을 입는 시대의 모습이었다. 고려의 의복은 결국, 사람을 나누고 구분 짓는 강력한 언어였으며, ‘무엇을 입느냐’보다 ‘누가 그것을 입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