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한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으나, 외침과 내부 부패, 제도적 허점이 누적되며 국방 체계가 서서히 붕괴했다.
1. 문치주의의 그림자: 무신의 배제와 군사력 약화
고려 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중앙군과 지방 군을 병행한 체계적인 국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2군 6위 체제는 수도 경비와 전국 방어를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국왕과 중앙 귀족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되고, 문신 중심의 정치 운영이 확고해지면서 무신 계층은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는 국방 운영에 있어 군사적 전문성과 실무 경험이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군사 조직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문치주의는 유교적 이상과 결합하면서 ‘무력’보다는 ‘도덕’을 통치 기반으로 삼는 경향을 강화했다. 이는 외적의 위협이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이 아닌, 외교나 제도 개편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낳았다. 실제로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 민족의 위협이 증가하던 시기에도 고려는 전면적 국방력 강화보다는 회유와 타협에 집중했으며, 군제 개편은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지방의 방어 체계는 점차 허술해졌고, 중앙군마저도 고위 귀족의 사병처럼 운영되며 실질적인 전투력이 감소했다. 훈련과 전투 준비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무기와 장비의 낙후는 물론 병력의 충원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빈틈은 결국 외세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무신들의 반란이 빈번해진 것도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이처럼 방치된 국방 현실에 대한 무력한 반발이기도 했다.
2. 지방 군의 해체와 병농일치 제도의 실패
고려 초창기에는 지방의 안정을 위해 군현 단위로 조직된 지방 군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농민들에게 일정한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병농일치 체제는 군사력 확보와 동시에 농업 생산을 병행할 수 있는 효율적 방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귀족 중심의 사적 농장인 ‘장원’이 증가하고,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면서 이 제도는 급격히 무너져 갔다. 지방의 향리 계층은 중앙 귀족이나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과세 대상인 토지를 은폐하고, 병역 회피를 방조했다. 이는 곧 국가 차원의 병력 확보 실패로 이어졌으며, 지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지방 군의 병력은 점점 축소되었고, 병역 회피자들이 증가하면서 실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사의 숫자는 급감했다. 이와 함께 군기를 유지하고 훈련을 담당하던 지방 수령들도 군사적 책임보다는 경제적 수탈에 집중하면서, 병농일치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지방에서 조직된 의병이나 향군조차도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으며, 국가 차원의 지원도 미비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지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극히 한정적이었고, 그나마도 장비와 식량 부족으로 실질적인 전투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국방 체계가 ‘수도 방어’에만 집중되면서 지방은 외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구조가 되었고, 이는 외침에 대한 전국 단위의 일관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3. 몽골 침입과 군사 구조의 붕괴: 반복된 항복과 자주의 상실
고려 국방 체계의 최종적인 붕괴는 몽골 제국의 침입을 계기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략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전국적인 장기 전이었고, 고려는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국토 전반이 피폐해졌다. 초기에는 강화를 통한 타협 전략으로 대응했으나, 몽골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조직력 앞에 고려의 국방 체계는 허점투성이였음을 드러내게 된다. 몽골군은 기동성과 파괴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고려 각지를 유린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등의 수세적 방어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수도 보호에 성공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국방 체계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고려는 군사적 자주성마저 상실하며 외세 의존적인 체제로 전락하게 된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는 국방 체계를 재정비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고, 이후에도 원 간섭기 동안 고려 왕실은 군사적으로 독립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군사 전략과 병력 운용은 원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관례화되었고, 자주적 방어력은 사라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고려는 이후에도 외세의 위협에 무력한 모습을 반복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