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단지 성군이 아니었다. 그는 경청과 실천, 그리고 사람을 믿는 리더십으로 조선을 바꾸었다. 진정한 리더의 본질을 세종에게서 다시 묻는다.
1. 듣는 왕, 말보다 귀로 다스리다
세종대왕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이자,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단순히 업적의 크기나 자비로운 성정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 본질은 '경청'이라는 단어에 있다. 세종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택한 왕이었고, 바로 그 점이 그의 리더십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집현전’이 창설되었고 수많은 학자들이 나라의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했다. 세종은 단지 학문을 장려한 것이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에 타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방식’을 제도화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신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닌, 다양한 사회 계층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구조였다. 세종은 이를 통해 왕의 판단이 아닌, 공동의 지혜를 바탕으로 나라를 움직이고자 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비판에 대한 태도였다. 세종은 신하들의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논쟁을 장려했고, 때로는 자신의 결정이 틀렸을 경우 과감히 수정했다. 예를 들어, 세금 제도 개혁 과정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신중하게 논의를 진행했고, 지방 관리들의 의견까지도 반영하였다. ‘왕은 절대 틀릴 수 없다’는 기존 왕권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이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했고, 그 틀림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갔다.
그의 ‘경청의 리더십’은 결국 사람들에게 신뢰를 안겼다. 권력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만들었다. 세종의 가장 큰 힘은 바로 ‘듣는 귀’에 있었고, 이는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리더에게 기대하는 덕목 중 하나는 바로 이 ‘듣는 힘’이다. 그 누구보다 많이 들었던 왕, 세종은 그 점에서 가장 앞선 시대의 리더였다.
2. 사람을 믿고, 자리를 내어주다
세종의 리더십에서 가장 인상적인 또 하나는 ‘권한의 위임’과 ‘사람에 대한 신뢰’였다. 그는 왕이라는 절대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는 뒤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이처럼 ‘왕이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함 대신, ‘사람이 모이면 더 나은 지혜를 낸다’는 믿음은 그의 통치철학의 중심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집현전 학자들에게 준 권한이다. 세종은 단지 학문 연구만 하도록 두지 않았다. 한글 창제, 농서 편찬, 역법 개정, 악기 제작 등 국가적 중요 사안을 맡겼다. 이는 단순한 업무 분담이 아니었다. 세종은 그들을 하나의 독립적 사상 집단으로 존중했고,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답을 찾도록 도왔다. 왕이 앞서서 이끌기보다는, 이들이 창조적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실패에 관대했다. 과거 다른 군주들이 실수를 벌로 다스렸다면, 세종은 실패조차 학습의 기회로 보았다. 새로운 시도를 허용하고, 실현되지 않은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다. 천문학자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 중 문제를 일으켰을 때조차, 세종은 그를 책망하기보다 격려했다. 이는 단지 기술적 결과를 넘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 가능성을 더욱 신뢰로 보듬는 모습은 오늘날 조직에서도 보기 드문 리더십이다.
세종은 위에서 명령하고 아래에서 복종하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으로, 아래의 재능을 통해 나라가 움직이도록 설계한 사람이다. 그는 자리를 차지하기보다, 자리를 만들어 주는 리더였다. 구성원의 성장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디자인했고, 스스로 물러나는 자리에서 더 큰 권위를 얻게 되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진짜 리더는 자리를 내어줄 줄 안다’는 말을 증명해 주는 예가 아니었을까.
3. 백성을 위한 지식, 실용으로 빛난 사유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지식과 사유를 어떻게 ‘현실’로 연결할 수 있느냐에 대한 훌륭한 모델이기도 하다. 그는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한 학문’을 추구했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그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의 지적 역량은 경전과 사서에만 머물지 않았고, 농사법, 의학서, 음악이론서, 기술서 등 실용서로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는 단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실제로 개선하기 위한 시도였다.
세종은 지식을 귀족의 전유물로 두지 않았다. 한글 창제는 그 상징적 결과물이다. 그는 백성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필요로 했다. 훈민정음 창제에 담긴 철학은 단순한 문자의 개혁을 넘어서 ‘정보의 민주화’를 꿈꾼 것이다. 당시 기득권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이를 강행한 이유는 명확했다. 글을 읽을 수 있어야 법을 알고, 의약을 이해하며, 자신의 권리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자의 보급은 곧 삶의 질과 직결되었고, 그 방향성은 탁월한 리더의 선견지명이었다.
또한 그는 농사직설을 통해 농민들이 각 지역에 맞는 작물 재배법을 익힐 수 있도록 했다. 단순한 지식 나열이 아닌, 실제 경험을 수집하여 집대성한 이 책은 오늘날의 ‘농민 실용 매뉴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백성의 생존을 단지 관리의 문제로 보지 않고, 과학과 지식으로 뒷받침해야 할 분야로 여겼다. 한 나라가 건강하려면 백성이 먹고살 수 있어야 하고, 그 시작은 곧 ‘지식의 현장화’였다.
세종의 사유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정치에 적용하고, 제도를 설계하며, 정책을 실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기준은 ‘백성’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지도자가 말하는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세종이 실천한 ‘백성을 위한 리더십’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조용한 실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