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이상적 개혁 군주였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그의 개혁이 왜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들여다본다.
1. 탕평책의 이상과 붕당정치의 실체 사이
정조의 개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지켜보며 붕당정치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깊이 체감한 군주였다. 이에 따라 즉위 후 그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초계문신제’와 같은 새로운 인재 양성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국정 운영 방식처럼 보였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미 붕당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 생존의 문제로 고착화된 권력 구조였다.
특히 노론은 이미 조선 사회의 관료 조직과 지역 기반, 사상적 영향력까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정조의 의지가 곧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그가 남인 출신의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소론 및 싶아 계열 인사들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실질적 행정 경험과 네트워크에서 열세였다. 또한 정조 자신도 완전한 무당파가 아니었고, 사도세자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복수를 원하는 감정이 개입된 만큼, 탕평은 실질보다 형식으로 흐르기 쉬웠다.
정조는 타협과 균형의 정치를 지향했지만, 조선 후기의 정치 환경은 이미 극단적 이념 대립과 세력 다툼이 일상화된 상태였다. 그는 노론 벽파와 노론 싶아 사이를 줄타기하며 정국을 이끌었고,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듯 보였지만 내부에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정조 사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노론 세력이 다시 득세하면서 그의 탕평은 급속도로 무너졌고, 개혁의 기반은 사라지게 된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것이 정조의 첫 번째 실패였다.
2. 개혁을 감당하기엔 너무 단단했던 조선의 틀
정조는 실학의 후원자이자 행정 개혁의 실천가였다. 그는 신분 상승의 길을 일부 허용하고, 수령 권한 강화와 군제 개편, 상공업 진흥 등 경제적 개혁도 병행했다. 특히 수원 화성 건설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아닌, 새로운 행정 수도와 군사 전략의 중심지를 구축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기존의 한양 중심 질서에서 벗어난 권력 재편 의지였으며, 조선 후기 중앙 집권 체제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가는 그 변화에 쉽게 순응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은 양반을 중심으로 모든 제도가 설계된 사회였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 행정을 독점했고, 과거제와 향촌 자치, 세금 제도까지 모두 양반 중심 구조로 짜여 있었다. 정조가 내세운 능력 중심 인사 정책과 서얼 허통 확대는 곧 양반층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반발을 불러왔다. 지방 향촌 사회는 중앙의 변화에 매우 느리게 반응했고, 정조의 개혁은 관료 사회 내부에서는 정책으로 존재했지만, 백성들의 체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또한 상공업 진흥 정책 역시 제한적인 효과에 그쳤다. 조선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 이념체계였고, 상인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정조가 신설한 ‘장용영’이나 ‘대전통편’ 등의 제도는 정권 운영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전 사회 구조를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혁은 강력했지만, 조선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양반 중심의 유교 질서에 익숙해져 있었고, 변화에 대한 저항이 그보다 더 강력했다. 이는 정조 혼자만의 개혁으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시대의 벽이었다.
3. 개혁의 끝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정조 사후의 붕괴
정조는 철저하게 자신 중심의 개혁을 이끌었다. 그의 개인적인 지적 역량, 정치력, 통치철학은 당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개혁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정조가 구축한 개혁 구조는 너무나 ‘정조 개인’에게 의존해 있었고, 그의 정치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고 계승할 인물이 없었다. 초계문신제도는 정조 사후 폐지되었고, 장용영은 무력화되었으며, 탕평 정책도 노론 중심의 붕당 정치로 되돌아갔다.
이는 정조가 개혁을 제도화하기보다는, 자신의 통치 역량으로 버티는 방식에 의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그는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최대한 제도화를 시도했지만, 각 제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실학자들이 중심이 된 정책 라인도 후계자 정권에서는 배제되었고, 유배되거나 실각한 인물도 많았다. 정조가 남긴 유산은 문자로는 남았지만,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정조의 죽음 이후, 순조가 즉위하고 대리청정 체제가 시작되면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본격화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퇴보가 아니라, 정조 개혁의 실패를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이었다. 사람에 의해 시작된 개혁은, 사람에 의해 무너졌고, 정조가 꿈꿨던 근대적 조선은 현실의 권력 구조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그의 개혁은 제도가 아니라 의지였고, 구조가 아니라 인물에 의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인물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정조는 시대를 앞서 있었지만, 그 시대는 정조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정조의 개혁이 끝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였다.